구원자들 | salvation, destiny
"사랑해, 나를 구원해 줘."
뭐?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던 재현이 뒤돌아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눈을 들자마자 헬멧을 쓴 머리가 돌진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영훈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재현이 헬멧 위로 머리를 댔다.
"뭐라고 했냐니까. 왜 나 모르는 말 해."
"별 말 안 했는데."
"아니야, 좀 중요한 말 했잖아."
"아니거든. 나는 모르겠고, 이러다가 대장이 뭐라고 하겠다."
하는 수 없이 영훈을 놓아 준 재현이 모두가 분주하게 전투 준비 중인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분명 어제도 전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또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궁금해하는 것이 없도록 훈련된 재현이 바로 앞에 가지런히 선 영훈의 뒤에 서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렸다. 소집이 몇 번이 있든, 전투가 몇 번이 있든, 동료가 몇이나 죽어나가든, 궁금해하지 않는다. 같은 옷을 입었다면 동료고, 그렇지 않으면 반군이니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왜 막 만져. 영훈이 중얼거린다. 킥킥 웃은 재현이 장난스럽게 영훈에게 더 바짝 다가섰다. 방탄조끼를 입어 두툼해진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꼬집자 영훈이 지지 않고 뒷꿈치로 재현의 발을 밟았다. 그러는 사이에 양옆으로 다가선 얼굴들이 죄다 낯설었으나 이것도 궁금해해서는 안 됐다.
만들어진 인간. 재현은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졌다. 사실 영훈도 그랬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다 자란 성인의 모습으로 눈을 뜨자마자 총을 잡고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다. 일종의 시험을 통과하며 자신이 불량품이 아님을 밝힌 이후에는 s로 시작하는 번호를 부여받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만들어진 인간이 아닌, 무리의 대장이 하는 말로는 수많은 전투는 도시를 위협하는 반군과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물론 가끔 이렇게 어린 아이도 반란군이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손은 이미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모르는 얼굴들이 끊임없이 스쳐가고, 새로운 얼굴들도 끊임없이 들어왔다. s1028 재현과 s1029 영훈이 가까워진 것도 이런 일상 속에서였다. 친해진다. 대장은 재현과 영훈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친해져 봤자 좋을 거 없는데.
가르치지 않은 것은 배우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도 끊임없이 대장의 말을 의심했다. 좋을 게 없다고?
"이재현, 쫌 하지 마. 이제 똑바로 서."
"아까 중앙탑에 녹색등 뜬 거 봤지? 오늘은 진짜 별을 만날 수 있을 수도 있어."
"네 말 안 믿어."
영훈이 팔꿈치로 가볍게 재현을 밀어낸다. 몸이 맞닿을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비식비식 웃음이 샜다. 좋을 게 없다니. 좋을 거 많은데. 하지만 대장은 꽤 자주 뜻 모를 말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대충 넘기면 그만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응?"
"....."
대장이 하는 말보다는 영훈이 하는 말이 오백 배는 더 신경이 쓰인다. 오늘도 전투가 있으니까 곧 나가잖아. 기계처럼 대꾸하니 영훈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미묘하리만치 은근하게 느껴지는 거리감에 끊긴 대화의 끝을 붙잡은 영훈을 살피는데 헬멧 뒤통수에 작게 흠집이 눈에 들어왔다. 재현이 얼른 그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이건 영훈이 평소에 쓰고 다니던 게 아니었다.
"어디서 났어?"
"오늘 아침 배급."
아. 배급. 배급을 왜 새로운 물건으로 주지 않았냐고 물을 데도 없었지만 그다지 낯선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전투에서 사망한 동료들의 것을 줄 때도 있었다. 또, 가끔 불량품들이 쓰던 물건들이 오기도 했다. 일련번호를 부여 받고 군에 입대를 해서도 종종 불량품으로 솎아지는 일은 빈번했으니까. 이유가 이렇게 다양했음에도 재현은 한번도 그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제대로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이건 아마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영훈이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던, 뜻모를 말을 하는 까닭도 짐작이 됐다. 헬멧 안에 써 있었겠지. 모습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장을 기다리며 문 앞을 응시하던 재현이 영훈을 불렀다.
"영훈아."
오늘따라 이름이 입 안에서 거칠거칠 겉돌았다. 일련번호로만 인식되고, 불리는 이들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저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재현아, 이름은 원래 부모님이 지어 주는 거래. 군인 묘지를 지나다 젊은 하사의 이름을 따 이제부터 이재현이라고 불러 달라는 재현에게 영훈이 건넨 첫 마디였다.
그런 거 알 반가. 우리는 부모님이 없는데. s1029는 너무 길어. 김영훈이 편해. 영훈의 이름은 재현이 지었다. 김영훈 어때? 너 김영훈처럼 생겼어. 영훈은 광대가 둥그렇게 올라가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부터 재현은 재현이, 영훈은 영훈이 되었다. 좀처럼 말을 섞지 않는 부대 내에서 서로밖에 모르는 이름이었다.
태어난 인간들이 저마다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갖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뜻할 것이다. 영훈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야 알 수 없었지만 재현도 그런 의미로 영훈이 소중했다. 전투에서 죽어서도 안 되며, 불량품으로 분류되어도 안 됐다. 당연히, 가르치지 않는 말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헬멧을 써서도 안 됐다.
"영훈아."
"자꾸 왜."
"헬멧 이리 줘."
영훈이 왜냐고 묻기도 전에 헬멧을 벗기자 어리둥절한 얼굴이 나타난다. 창백한 전등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얼굴의 영훈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야, 이재현. 왜 그러는데.
대장이 왔음을 핑계로 재현은 입을 떼지 않았다. 죽어가는 이의 기록이 남은 헬멧 속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든 영훈이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둘 수 없다. 대장, 크게는 정부가 하는 일에 불만을 가지는 인간들이 늘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게 자신들처럼 '만들어진' 인간에게도 해당되는지는 몰랐다. 작은 여지라도 남길 수 없지. 대신 자신의 헬멧을 벗은 재현이 영훈의 머리 위에 직접 씌워 주었다.
오늘 소탕할 지역에 대해 설명하는 대장의 말이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재현은 의식처럼 영훈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언제나 느꼈지만 만들어진 인간들의 윤리니, 반란군이 주장하는 것들이니 재현에게는 전부 아무래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눈앞의 영훈만 있다면.
*
여기는 1028, 본부 응답해라. 여기는 1028..... 재현이 먹통이 되어버린 무전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영훈은 a구역으로 갔으니 지금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있을 것이다. 영훈만 무사하다면 모든 걸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모래 폭풍 때문에 눈앞이 온통 뿌옇게 변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성가셨다. 발밑에 밟히고 차이는 게 누구의 시체인지도 모르는 곳을 한참이나 걷던 재현이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굉음에 몸을 숙였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숨이 턱끝에서 자꾸 걸린다. 커다란 돔으로 덮인 도시 밖으로 나오면 대부분이 이랬다. 돈이 있는 사람만이 돔 안에서 깨끗한 공기를 누렸고, 나머지는 캔에 담긴 공기를 마셨다. 그나마도 없는 이들은 방독면을 썼고. 바로 옆에 방독면을 쓴 반군 시체가 누워있다. 미동도 없는 인간을 툭 건드려 본 재현이 그가 들고 있던 낡은 총을 빼앗았다.
태어난 인간들은 깨끗한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처럼 신체를 개조하면 될 일 아닌가. 정말 열등한 게 어느 쪽이지. 수명이 짧은 인조 인간들의 복지를 위해 투쟁하던 자들을 떠올린 재현이 살짝 웃었다. 이거나 저거나 바란 적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저 피곤하고, 얼른 본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김영훈 지금 뭐 할까.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며 영훈을 생각하는데 누군가 허벅지를 움켜쥔다. 순식간에 총을 장전한 재현이 자신과 똑같은 까만 옷을 입고 있는 상대를 보고 손을 내렸다.
"뭐야."
"1028, 지원병은 언제 오나."
"...올 리가."
헬멧을 벗어던진 1122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들썩거린다. 온 얼굴이 피로 뒤덮여있는데다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부상의 정도가 심각한 그에게 재현이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어설픈 치료를 시도하는 대신 재현은 1122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대충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1122가 몸을 웅크린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하거나, 참으라고 하는 말은 예의상으로 꺼낼 수 없었다. 부대 안에는 병원은커녕 응급 처치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으니까.
"쓰고 버리면 그만이지."
"...뭘."
"우리 말이야. 1028, 입대한 지 5년이 넘었다고 들었어."
"그랬나."
"우리같은 인간들 수명치고 오래 살았네. 네가 부러워."
"수명이 뭐야. 그런 거 안 믿어."
"1028,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어."
"...."
"정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마지막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 운명은 조금 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1122는 인조 인간으로 꿔서는 안 될 꿈을 꾼 것 같았다. 눈동자는 재현을 향해있었지만 그는 저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지. 말하는 재주도, 듣는 재주도 없는 재현을 원망하지 않는 1122의 손에 힘이 풀린다. 재현은 하릴없이 1122를 보았다. 죽지 마.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알 턱이 없는데도 태어난 인간들처럼 코 밑이 따갑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말해 봐, 1028. 우리가 구원자라면, 우리는 누가 구해 줘? 구원자. Savior. 부대 이름이었다. 구원자. 반란군이든, 먼지 폭풍이든. 도시를 위협하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구원자. 재현은 단 한번도 자신이 구원자라고 여긴 적이 없었음에도 1122의 말 덕분에 구원자 너머의 구원자를 고민해야 했다.
우리는 누가. 그리고 끝.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말이 없다. 때마침 포화 소리도 멎었다. 의미없이 11122에게 말을 걸던 재현은 태어난 사람들의 관습처럼 하늘을 보고 죽은 1122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앉았던 곳에서 일어난 건 한참 뒤였다. 드문드문 총알이 날아오는 사이를 지나 등대처럼 불이 깜박이는 본부로 돌아갈 때까지도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누가 구원해 줘.
재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영훈을 찾는 일이었다. 다친 곳 없이 본부로 돌아온 것은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어김없이 부대 내 숙소에 있는 영훈을 발견한 재현은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입은 벌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재현 뭐야. 어디 있다가 이렇게 늦게 왔어."
"....."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찡그리고 있어."
그제서야 재현은 자신이 찡그리고 있음을 알았다. 태어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나? 재현보다 더 먼저 만들어진 인간들은 표정을 짓는 법을 몰랐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자유롭게 얼굴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영훈은 재현의 표정을 따라하고 있었다. 유독 다양한 표정을 가진 영훈은 재현과는 다르게 가르치지 않아도 종종 배우는 게 있었다. 표정을 보고 상대방의 기분을 추측하거나,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은.
"너 완전 울상인데."
".....별거 아니야."
"울었어?"
"우리가 어떻게 울어."
재현이 가만히 영훈의 옆에 앉았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몰라도 영훈과 팔이며 다리가 맞닿으니 귀를 할퀴어대던 소리들이 멎었다. 우리는 누가 구원해 줘. 너는. 김영훈은.
"재현아."
"듣고 있어."
"내일모레는 모래 폭풍이 잠시 걷힐 수도 있대."
"...."
"돔 가까이 가면 진짜 하늘이 보일 거야."
하늘과 별을 이야기하는 인조인간은 없다. 영훈은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밉거나 싫지 않아. 그저 그런 네가 사라질까 봐 불안할 뿐이야. 영훈이 가지고 있다는 수많은 감정이 덩달아 옮은 느낌이었다.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나도 속상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도 되는데 그냥 좀 마음이 아파서. 재현의 등을 토닥이던 영훈의 머리가 어깨에 톡 얹힌다. 서로의 체온을 주고 또 받는 행위에 묵은 생각들이 날아간다. 재현은 이런 것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위로. 영훈은 지금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영훈의 팔 위로 붉은 생채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긁혔을 법한, 그렇게 크지 않은 상처였음에도 재현은 저절로 무시무시한 폭탄이나 총을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영훈에게 상처를 입힌 양 아파서. 그러니까, 마음이.
가슴팍을 다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힘겹게 위로 솟아올랐다. 누군가 주먹으로 퍽퍽 때리고 있는 것도 같다. 쉽게 말하면 아픈데, 다쳐서 아픈 건 아닌 그런. 바로 방금 전에 영훈은 마음이 아프다고 그랬다. 뽀얀 볼을 쳐다보던 재현이 주어없이 물었다. 많이 아파?
"음... 조금."
"나도 아파."
"어디가? 다쳤어?"
"마음이 아파."
속상해. 이렇게 말하는 게 맞네. 재현이 검지로 심장이 있는 곳을 가르키자 영훈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댔다. 아프지 마.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재현이 영훈을 보다가 반질반질한 이마를 입술로 꾹 눌렀다. 대장이 아내 사진에 이렇게 하는 거 봤어. 다급하게 덧붙여도 멀뚱히 앉아 눈만 깜박이던 영훈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우리는 꼭 태어난 인간 흉내를 내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찰나에 많은 것들이 오고간다. 재현은 뻐근할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거울처럼 비친 얼굴은 더이상 찡그리고 있지 않았다.
*
코에 쇠냄새가 밀려들어온다. 무기를 손에 오랫동안 쥘 때의 냄새 같기도 했고, 탱크 로봇 안에서 맡았던 냄새 같기도 했다. 시야가 불분명해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자 빨갛게 피가 번졌다. 땅으로 발이 쑥 꺼질 듯 하다가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주 오랫동안 불쾌한 꿈을 꾼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제대로 파악할 시간은 당연히 없다. 총알이 떨어진 총을 아무렇게나 버린 재현이 주머니를 뒤져 레이저 총을 장전했다.
무전기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이정도로 반군의 숫자가 많다면 본부에서 진작에 철수 명령을 내렸겠지만 들을 수 없었다. 땅을 울리는 대포 소리들이 가까워졌다가 일순간 멀어져가는 사이에서, 재현은 온통 붉게 변한 바위에 등을 대고 앉았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부상을 당한 영훈이 여기 있어서.
"이재현, 괜찮아?"
"너는."
"나는 괜찮아."
"안 아파?"
"그렇게 말하니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안 아픈 거야."
영훈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자 힘없이 끌려온다. 머리를 땅에 둘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허벅지 위에 올린 재현이 빠르게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런 곳에서, 하필 이런 영훈을 만난 게 원망스럽다가도 다행이었다.
적어도 나는 너를 버리고 가지는 않잖아. 재현이 영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검지로 살살 쓸어올리며 말했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 사이사이로 영훈이 잔기침을 했다. 갈비뼈 부러졌나 봐.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직접 눈으로 상처를 확인하기가 망설여졌다. 재현은 대신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이 땅 위에서는 무수한 목숨이 피를 흘리며 죽어도 모래 폭풍이 걷힌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하늘은 온통 맑았다. 신기해. 재현이 말하고, 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돔 위에 떠오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새파랗고 넓다. 끝과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시선이 다 닿지도 않아서 그저 보고만 있는 것으로 온 정신을 빼앗길 지경이었다.
"영훈아, 하늘 예쁘다."
"그러게."
"구름도 좀 예뻐."
"응."
"너도."
"...."
"너도 예뻐."
잔잔하고 맑은 눈동자 위로 파란 배경이 깔리고, 구름이 둥둥 지나간다. 그리고 그 안에 영영 갇히고만 싶은 마음까지. 재현은 태어난 인간들이 내내 예쁘다고 하는 게 이런 감정이리라고 믿게 되었다. 예뻐. 그리고 계속 보고 싶어. 영훈이 입술을 쉴 새 없이 뻐끔거렸다. 계속 보고 싶으면 봐도 돼. 진짜로.
모두와는 다른 영훈이 불량품일 리가 없다. 네가 불량품이면 세상 어디에도 제대로 된 건 없을 거야. 나 1122가 죽는 걸 봤어. 재현이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1122처럼 우리도....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에도 영훈은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영훈이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주 잡자는 뜻인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손을 잡는다고 해서 재현과 영훈의 상처가 낫는 것도, 본부에서 지원이 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까지고 그 손을 붙잡고 싶었다. 그래야 했다.
"영훈아, 손 따뜻하다."
"....."
"돌아가자. 다시 본부 가."
우리가 구원자라면, 우리는 누가 구원해 줘? 어느 벌판에 쓸쓸히 누워있을 1122가 속삭인다. 통 제기능을 못하는 것 같은 귀를 툭툭 두드린 재현이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살폈다. 경계해야 할 적은 없다. 모래 먼지가 걷혀 몸을 숨기기에 좋지 않았으나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라는 뜻이 된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할 수 있었다. 이런 건 훈련도, 실전도 누워서 떡 먹기였다. 쉬워. 우리가 구원자라면. 네가 내 구원자라면, 너는.
"내가 구해."
"나 귀 고장났나 봐. 나 잘 안 들려."
"내가 구해 줄게."
영훈처럼, 가르친 적도 없는 걸 배웠다. 다리가 터질 것 같고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는데도 재현은 영훈을 업고 일어섰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다. 수명이고 운명이고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내가 이길게. 내가 구할게.
사랑해, 너도 나를 구원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