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 salvation, love and hatred
해질녘이었다. 창으로 스민 노을빛이 방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베이비 파우더 향 입자가 부유하는 공간이었다. 현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긴장이 바짝 섰다. 열기의 발원, 영훈이 눅진한 바닥에 두 다리를 내딛는다.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무릎으로 기다시피 발걸음을 떼야 했다. 살짝 열린 문 발치까지 다가가 문고리를 움켜쥔다.
“영훈아, 안에 있어?”
문고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놓치고 말았다. 덜컥이는 잡음에 재현이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태연자약한 눈동자가 영훈을 훑었다. 재현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노을의 붉은 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얼굴엔 아무런 미동도 없다. 시선은 영훈이 먼저 피했다. 늘상 그렇듯. 그 맹수 같은 눈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약 사 왔어.”
그건 분명 구원의 목소리였으나 정작 본인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호소력 짙은 음성을 애써 외면한 채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었다. 또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이 지옥 같은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다.
기시감이 일었다.
그날도 이랬다. 전신을 파고드는 생경한 감각에 속수무책으로 젖어들 때였다. 코를 틀어막은 재현이 다가와 반쯤 정신을 놓은 영훈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첫 히트 사이클을 맞은 영훈에게 구세주 노릇을 자처한 건 재현이었다. 거짓말처럼 달아올랐던 몸이 조금 진정되나 싶더니, 이제는 애가 닳았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재현아, 나, 어떻게 좀… 해줘. 제발…….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지던 음성을 끝으로 영훈은 재현의 품에서 무너졌다. 욕구를 누르기 위해 안간힘 쓰는 재현의 손이 달달 떨렸다. 손이 부족해 코를 쥘 수 없으니 숨을 참았다.
베타는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는데도.
덜컥이는 잡음이 상념을 깼다. 문고리는 너무나도 쉽게 조각났다. 그걸 박살 내고 들어온 재현의 손에는 물컵과 약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영훈은 여전히 재현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한때 제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그 충견인지, 그저 오메가의 호르몬에 감응하는 짐승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영훈의 턱을 잡아 벌려 억제제를 밀어 넣는 순간까지도.
“너 삼키는 거 볼 때까지 못 놔.”
“꺼져, 제발…….”
힘없는 목소리가 짓이겨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징후가 시작된 순간부터는
이미, 늦었는데
넌 그것도 모르지.
한평생을 알파로 살아온,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재현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분노를 여실히 드러내는 영훈을 보며 재현은 자신이 평소에 품던 관념을 다시금 굳혔다. 재현은 영훈이 꼭 유리 같다고 생각했다. 속이 투명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잘못 건드리면 깨지기 십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건드리고 싶었다. 그 애의 세계를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영훈의 손길에 의해 뿌리쳐진 유리컵이 공중에 떠올랐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허공을 찢음과 동시에 깨진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 내렸다.
결국 제 본질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깬 건 영훈 본인이었다. 그래 봤자 종국에는 재현에게 매달릴 처지임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원초적인 본능이 꿈틀대며 영훈의 곪아 터진 속에 가득한 재현의 향한 증오를 밀어내고 있었다. 악마에게 손을 뻗었다.
영훈은 비로소 저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했다.
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로미오
기(起)
1인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와 더불어 미미한 베이비 파우더 향이 감돌았다. 간이 의자에서 졸고 있는 재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이 공간을 훑고, 과일바구니를 거쳐 창가에 놓인 화분에 정착했다. 조금 앳된 얼굴의 영훈은 한동안 그것을 말없이 응시했다. 하얀 화분 안 싱싱한 초록 잎사귀가 생기를 머금고 뻗어 있다. 핏기없는 영훈의 얼굴과 대비되었다. 언뜻 그의 생기가 거기로 다 옮겨간 듯했다. 이내 무감한 시선조차 거둬졌다. 재현이 근 30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골랐단 사실을 영훈이 알 리 없었다. 어차피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훈을 위로할 수 없을 테니까. 재현은 분명 공기 정화 식물이란 말에 혹해 샀지만 여전히 공기는 탁했고, 영훈의 속은 미식거렸다.
영훈이 오메가로 발현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종 알파 가문에서 오메가가 어떻게……. 그러니까, 영훈은 변종이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다들 쉬쉬했지만 어느새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도 암암리에 퍼졌다. 물론 그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았다. 그러니까 최초의 발견자인 재현만 입 다물면 그리 될 것이었다. 그때 영훈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영훈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지원할 때까지도 형질이 발현되질 않아 알파들만이 진학하는 학교에는 지원하지 못했다. 훗날 알파로 발현된다면 그때 전학 수속을 밟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래도 베타들이 다니는 학교 중에서는 나름 명문에다 사립이었지만 아버지는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별로 기뻐하는 내색이 없었다. 익숙했다.
대신 축하해 준 건 재현이었다. 그날 밤, 재현이 영훈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가 예의 그 미소로 입학을 축하한다며 다가왔다. 그래도 그때는 꽤 진심 같았다. 영훈에게 선물이 내밀어졌다.
"곁에 두면 행운을 가져다준대."
미신 따윈 믿지 않았으나 의외로 위안이 되었다. 고마워. 수줍게 받아들던 그때만 해도 그 선물이 의미인지 영훈은 알지 못했다. 가진 것은 많았으나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영훈은 그것을 내내 몸에 지녔다. 그 덕분에 삼 년 내내 무탈하게 학교를 다녔고, 도처에 도사리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굳이 전학을 가진 않기로 했다. 애초에 입학할 때는 베타였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 베타 사이에선 약 제때 챙겨 먹으면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다 괜찮을 거야, 정말…….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왜 하필 나일까. 왜 내가 그 형질을 가지게 됐을까. 아무개의 말마따나 뿌리 깊은 알파 집안에서 저 혼자 변절자였다. 그저 곱씹을수록 더해지는 건 한숨뿐이기에 더 생각하기를 관둔 거다. 그리고 재현으로 저를 위로했다. 어차피 자신은 걔보다 가진 게 많았기 때문이다. 베타인 재현은 아직 호적에도 들지 않았으며, 반쪽짜리 혈육도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춘기를 핑계로 서먹해진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재현이었다.
영훈의 호르몬은 입자 고운 베이비 파우더 향이었다. 그가 머문 자리에 늘 미약하게 섞여 있곤 했다. 그리도 혐오하던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소소한 일탈이자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첫째는 누군가가 자신을 얕볼까 봐. 그래 봤자 숨어 피우는 게 고작인 주제에. 둘째는 체향을 숨기려 함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영훈에게선 세 가지 속성의 향이 한데 섞여 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영훈의 본래 체취, 담배 냄새, 그리고.
재현이 준 물건으로부터 묻어나는 그의 체취. 영훈은 몰랐지만 그건 미미한 정도만으로도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주기 충분한 우성 알파의 표식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던 영훈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재현은 대답 없이 짓씹히는 영훈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제 심리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애였다. 초조함에 영훈이 시선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빨리.
“안 그럴 테니까 적당히 피워.”
영훈의 하얀 손끝에서 허연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가로등 조명을 받은 속눈썹 밑에 그림자가 졌다.
“너도 피울래?”
둘은 그렇게 공범이 되었다. 한 모금 빨고는 재현이 말했다.
“꼭 너 같은 거 피우네.”
내 취향은 아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근데 영훈아, 향은 흘리고 다니지 마.”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 봤자 담배 냄새를 지우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베타인 재현이 제 체취를 맡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어느 날은 아버지께 덜미를 잡혔다. 쏟아지는 추궁에도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영훈을 두둔하고 나선 건 다름 아닌 재현이었다.
“그거, 제 거예요.”
‘Raison French Yogo’ 아버지의 손아귀에 들린 담뱃갑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요거트 향 캡슐이 탑재된 담배였다. 제삼자가 봐도 재현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호기심에 피워 봤어요. 그리고 영훈이 방에다 제가 숨겼어요. 아시잖아요. 영훈이는 종일 학원에 있고, 저는 집에서 공부하는 거.”
공교육에 충실했던 재현은 늘 정시에 하교했고,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피해간 사교육에 몸담은 영훈은 학원 수업을 마치면 자정에야 귀가했다. 염연히 말하면 부모님은 재현의 교육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단 뜻이 된다. 재현은 그 점을 이용했다. 눈 하나 깜짝 안 한 채로 뻔뻔하게 항변을 이어 나갔다. 다 거짓말이었다. 영훈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아버지와 대치 중인 재현의 단단한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찰음과 함께 재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영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버지는 평소 영훈에게 엄격할지언정 재현에게는 한없이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미 다 아는 눈치였으며 그건 분명, 제게 날리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영훈의 양심이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재현은 예의 그 친절한 미소로 문밖을 서성거리던 영훈을 맞았다. 잔뜩 풀이 죽어 위축된 어깨와 땅바닥에 처박은 시선 처리가 묘한 가학성을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들어와.”
“…….”
“미안하면 공부 가르쳐 주든가.”
“…….”
“그거 내 거 아니야?”
얼른 들어오라니까.
재현의 다정한 채근에 오히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이 더욱 부피를 키웠다. 영훈은 바나나우유와 학원에서 정리해 온 요약 노트로 그것들을 극복하려 했다. 조심스레 재현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좁혀졌다.
하지만 지금, 영훈은 그날을 후회한다.
“엄마, 나 친구 만들어 줘.”
이 모든 사단은 그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는 영훈에게 늘 일등을 강요했고, 영훈은 그것들을 꾸역꾸역 수행해 내었다. 2등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부면 공부, 대회면 대회마다 일등을 거머쥐었다. 그때까지 그의 인생에는 오로지 1밖에 없었다. 그러나 딱 하나, 사교성은 제로였다. 원체 숫기가 없어 누군가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는 먼저 다가가는 법을 몰랐다. 천성은 여렸으나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고픈 그의 마음이 아버지가 주입한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목표 의식에 짓눌렸다. 영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은 죽도록 탔다.
“안녕.”
또래로 추정되는 아이가 현관문 앞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이름은 재현이라고 했다. 그 시절의 재현은 영훈보다 키가 한참은 작았다. 낯을 가리는 듯 얼굴이 긴장에 절어 있었다. 재현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줄곧 영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듣기로는 먼 친척이라고 했다. 영훈은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 봤자 아직 애였다. 그저 친구가 생겼단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친구는 만드는 게 아니라 사귀는 것이라는 걸 몰랐던 탓이었다. 비로소 친구라는 명목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있으며, 어느 정도 유대감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낯을 가렸고, 애답지 않게 말수가 적었지만 짐짓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영훈의 환심을 샀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재현은 늘 그림자처럼 영훈의 곁에 숨죽여 존재했다. 영훈이 묻는 말에 모두 대답은 했으나 도통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영훈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들 일방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다 그것마저도 소재가 고갈되면 정적이 이어졌다. 재현은 친절하고 예의 발랐으나 표정 변화가 얼마 없고 잘 웃지도 않았다. 가끔 뱉어내는 웃음조차 어색했다. 그러니까, 딱히 재미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도 영훈은 재현이 좋았다. 부모의 사랑에 끝없이 목말랐으나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늘 부족한 사랑에 허덕였다. 그 허전함을 재현으로 채우고 싶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일방적으로.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재현이 바뀌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다정해졌다. 모두에게. 영훈은 여전히 사교에 서툴렀지만 재현은 유연하게 사람을 상대하기 시작하며 영훈 이외의 친구를 사귀었다. 영훈은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저에겐 재현밖에 없었으나 재현은 아니었다. 사랑과 관심에 목마른 영훈이 퇴행할수록 재현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영훈이 속으로 파고들수록 재현은 바깥으로 발을 뻗었다. 영훈이 그에 대한 열등감에 몸서리를 치며 더더욱 견고한 벽을 치는 동안, 재현은 이미 다방면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우등한 재현과 열등한 영훈. 둘 사이의 간극이 생기면서 영훈은 못난 자식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에 영훈이 오메가로 발현했다. 극심하게 벌어진 격차는 돌이킬 수 없었다.
영훈이 단지 열등감 때문에 재현을 미워하게 된 건 아니었다. 일조는 할지언정 그건 본질이 아니었단 소리다. 재현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려진 영훈의 오메가 진단이 둘 사이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래 봤자 재현은 베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폭염의 기세가 한풀 꺾인 끝 여름 무렵, 열여섯의 재현에게 불쑥 러트가 찾아들었다.
여름은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가 있는 공간은 타오를 듯한 열기로 가득 찼다. 재현은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창백하게 하얀 피부, 비정상적으로 가는 손목, 마주할 적마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순종적인 눈망울. 그런 주제에 어딘가 음울한 빛으로 젖어 있는 그 눈…. 그 특유의 눈빛에는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드는 미묘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흔적을 남기고, 부수고, 깨뜨리고, 망가뜨려 버리고 싶은 그것들을 떠올리며 연긴 성기를 주물렀다. 본능에 지배당한 이성이 자제력을 잃었다.
그리고 그것을 영훈이 보았다. 살의 가득한 중얼거림을 영훈이 들었다. 씨발, 김영훈. 재현의 입에서 나오는 생소한 욕들과 제 이름. 다 들어 버렸다. 타닥타닥. 제 존재를 숨길 생각조차 않고 달아나는 발소리까지 재현에게는 청각적인 자극이 되었다. 분출로서 끝을 본 재현은 덤덤하게 바지를 갈무리했다. 그날 이후로 영훈은 재현의 방 근처에 얼씬도 안 했다.
승(承)
재현은 고아였다. 태초에 고아일 수는 없다. 저는 어머니의 목숨을 삼키고 태어났다고 들었다. 출생이 곧 패륜이었다. 재현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의 부모는 알파였다. 제법 우수한 혈통임에도 태생이 죄였으니 그 대가로 황량한 불모지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겐 다 있는 게 제 수중에만 없었다. 처음에는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부모님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게 무의미한 일이란 걸 알아차린 뒤 현실에 순응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고 나서는 일찍이 세상 사는 법을 터득했다. 그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부유해 보이는 방문객이 나타날 때마다 명에도 없을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점점 재현의 눈빛에 나태함이 깃들었다. 모든 게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한 부부가 나타났다. 재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슥 훑어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꼭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권태로웠다. 어린 그에게는 추종자가 많았다. 지금보단 조금 앳되었으나 입체적인 이목구비 어디 안 갔다. 호감형인 재현에게 알아서들 다가왔고, 그를 원했다. 어쩌다 한번 시선 닿으면 수줍게 물드는 얼굴들이 우스웠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 추종자에서 그쳤다. 재현이 진심을 다하지 않았기에 친구까진 되지 못했다. 사는 게 뭘까.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존재론적 허무를 해소해 줄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차피 오랫동안 혼자였고, 그게 편했다. 그럼에도 재현의 곁에는 끊임없이 사람이 몰렸다. 힘들이지 않고도 무리에서 군림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난놈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관조하며 캐치해냈다. 재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던 재현의 눈에서 어느 순간, 나태함이 걷히고 번뜩이는 생기가 돌았다. 그 길로 재현의 형질 추측 검사는 신속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유전 형질 감식 결과
알파. 99.9%.
입양이 결정되었다.
처음으로 저택 현관에 발을 들일 때, 여자는 재현에게 신신당부했다. 도련님을 살뜰히 챙길 것. 눈에 거슬리는 짓은 일체 하지 말 것.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말 것. 곤란한 질문에는 그저 웃어 넘길 것. 그리고, 절대 형질을 발설하지 않을 것.
내 앞가림도 버거운 마당에 내가 누구 챙길 여력이나 되나. 재현은 속으로 코웃음쳤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근 몇 년 간은 영훈의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는 늘 헐렁한 옷을 입었다. 그래야 물려 입든, 물려주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음식도 아닌 옷 때문에 곤혹을 겪었다. 저택에 들어와서 처음 입어본 양질의 옷들은 원래 재현의 것이었던 양 완벽하게 감겨들었지만 갑갑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넥타이도 처음 매 봤다. 영훈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재현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재현은 묵묵히 그 손길을 받아내었다. 영훈이 티 없이 맑게 웃었다. 정말 잘 어울려, 재현아. 그때만큼은 그렇게 웃을 줄 아는 아이였다.
엄마, 재현이 멋지죠. 영훈은 제삼자에게 재현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객관적으로 근사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잘 어울리는구나. 여자의 영혼 없는 대꾸에도 영훈은 싱글벙글이었다. 눈치라곤 개 줘서. 재현은 요령 없이 맨 넥타이가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꾹 참아내었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컸다. 하지만 영훈은 여전히 어린애였고, 저에게 징징거리며 매달렸다. 피곤하게. 열여섯, 재현은 슬슬 이 지겨운 인형놀이에 신물이 났다.
아버지는 재현을 방임했으나 영훈에게는 한없이 엄격했다. 영훈의 등수가 내려가는 날이면 온 집안이 고요했다. 폭풍전야였다. 걔는 공부를 잘했으나 멍청했다. 필요 이상으로 쏟아지는 질책을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바보같이. 그리고 선천적으로 나약했다. 아버지가 매일같이 자신과 재현을 비교할 적마다 그저 움츠러들어 떨고만 있는 게 다였다. 영훈은 외적으로는 가진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본질로 파고들자면 영훈 본체 그 자체는 재현에게 비빌 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재현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재현이 어쩌면 평생을 걸쳐 가지지 못할 것들을 걔는 참 쉽게도 가졌다.
둘은 알까. 서로의 첫인상이 흰 눈과도 같았다는 것을. 그 추운 겨울날, 영훈에게 재현은 눈 속에 파묻힌 눈사람과 같았고 재현에게 영훈은 포근포근한 흰 눈과도 같았다. 우습게도 유약했던 영훈은 저보다 키가 작았던 재현을 지켜 주고 싶단 생각을 했고.
반대로 재현은 영훈의 순수함이 거슬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푹 들어가는 주제에 뚫리지 않는 건 꼭 젤리 같았으며, 속이 투명해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제에 제법 단단한 형질은 유리 같았다. 그건 잘못 건드리면 깨지기 십상이었다. 재현은 그런 영훈의 세계를 깨부숴 버리고 싶었다. 가능하면, 엉망으로.
딱, 그런 심리였다. 소복소복 쌓인 흰 눈을 보면 밟고 싶고, 갓 바른 시멘트 위에 발자국을 찍어 내고 싶고. 열등감 어린 얼굴로 너무도 쉽게 자신을 낮추며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씨발, 진짜.
극심한 가학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건드렸다. 김영훈을 자극할 때마다 쾌감이 일었다. 그럼 좀 사는 맛이 났다. 발길 닿은 적 없는 새하얀 눈길을 파헤쳐 놓는 느낌. 그러나 그 흙탕물 속에서 여전히 저 혼자 깨끗했다. 눈은 밟으면 그대로 발자국이 남아 구정물이 되어야 마땅한데.
늘 나만 더럽고, 나만 나쁜 새끼지.
재현은 파티 내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움츠러든 영훈을 보며 생각했다. 남다른 출발 선상에 올라서는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하고, 똥 씹은 표정 숨기질 못하는 것도 싫었다. 저 자신은 비위 좋게 진창에서 구르며 스스로를 낮출 줄 알았으나 자존심만 더럽게 센데다가 비위도 약한 김영훈은 주제에 가리는 게 많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멍청하게 어리바리 까는 영훈 대신 제가 거의 다 대답했다. 그 나이답지 않은 능숙함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재현은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풀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온종일 웃는 낯으로 있느라 내려올 일 없던 입꼬리가 아렸다.
비쩍 말라서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주제에 또 쓰러지진 않았다. 쓰러지면 멈출 생각이었는데, 그러질 않으니 나는 너를 좀 더 괴롭혀야겠다. 태양열을 흡수하기 위해 무식하게 키만 큰 침엽수처럼 사랑에 목이 마른 김영훈이 싫었다. 친구로서, 혹은 형제로서 나를 갈구하는 김영훈이 싫었다. 걔랑 친구 따윈 하기 싫고, 형제는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가장 싫은 것은, 이 모든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눈칫밥을 먹으며 눈치를 키웠고, 일찍이 철이 들었다. 신속하게 집안 기류를 읽어내었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영훈을 옥죄고 채찍질을 가하는 건 그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함일 테다. 강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공정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들에 대해 칭찬할지언정 독려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결국 나는 김영훈이 경영권 세습 과정에서 디딜 초석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이 거기까지 닿자 김이 샜으나 혹시 모를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었다. 보육원에서 제게 뻗은 남자의 손을 잡은 것처럼. 재현은 묵묵히 엎드려 칼을 갈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가시밭길에 살얼음판이었다. 어른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행동거지에 주의하고 속내를 숨기는 데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좀 더 머리가 자라고 나서는 익숙함이 능숙함으로 발전하여 미숙한 언행을 가공했다.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조차 잃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했다.
열일곱, 영훈의 감정 그래프는 불규칙한 곡선으로 날뛰어댔지만 재현은 언제나 일직선이었다. 반듯한 외모에 다듬어진 성격, 부모님 앞에서의 고분고분한 태도는 철저한 계산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머리 굴리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컸다. 가끔은 힘에 겨워 도망치고 싶은 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묵묵히 견뎌내었다. 모사가 나뒹구는 그 속에서 점점 마모되어 다듬어진 그는 꽤 근사하고 번지르르해졌다. 학습 능력도 뛰어나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가식이 곧 위트로 변모했다. 몸은 아직 덜 익은 주제에 제법 성인의 구색을 갖추었다. 재현은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뛰어들기도 전에 이미 완성형이었다.
그렇게 재현은 영훈의 몫을 하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전세는 뒤바뀌었다.
영훈에게 알파의 형질을 들킨 이후에는 일말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상하게 대했다. 그건 곧,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가는 김영훈을 괴롭히는 것과 같으므로.
그리고 아버지는 그 모든 광경을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재현에게 진실을 고했다.
“아비가 미안하다, 재현아. 사실은 내가 네 친부였단다.”
영훈은 단지 허수아비였다고.
재현은 자신의 위치를 훗날 이용될 정치 사업의 초석쯤으로 파악했다. 그러니까 재현의 역할은 곧 방패막이였으며,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단단히 자랄 잡초라는 걸 아버지가 알아보았기에 이 집안에 거둬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훈의 발현 이후 일이 조금 틀어졌겠지만. 여기까지는 오로지 재현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영훈이 오메가로 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훈의 어머니가 오메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문의 수치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생을 주물러 놓고 그리 뻔뻔히도 입을 놀렸다.
‘독한 새끼.’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울컥 차올랐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재현의 생명이 친모의 목숨과 맞바꿔진 건 사실이었으나 그건 출생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끈덕진 살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고 했다. 애당초 온갖 모사가 난무하는 바닥이었다. 재현의 안위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보육원에 처넣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재현의 아양이 부부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던 거였다. 아버지의 압력에 의해. 재현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꿋꿋이 경청했다. 그러고는 애 딸린 오메가 여자를 그럴싸하게 꾸며 내어 위장 재혼했다고 했다. 아버지와 피 한 방울 섞인 김영훈이 오히려 방패 격이었다. 한 번 납치된 적도 있댔다. 그래서 애 성격이 그 지경이 됐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 재현을 찾았다고 했다. 그래 놓고는 그간 재현이 영훈에 대한 열등감과 그의 나약함을 지양분 삼아 성장하는 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근본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김영훈이었단 소리지. 아버지의 좆같은 기만질은 둘째 치고,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선 친척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니 김영훈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설계로 인해 자연스레 주입된 증오감 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이 빌어먹을 감정이 동정인지 개탄인지 모르겠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혼자.
다음에는 같이.
기왕이면 같이 구원받고 싶었다. 혼자는 외로우니까.
재현은 아버지의 플랜대로 착실히 수행했다. 오로지 대의를 위해.
비상한 머리로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성적표를 받은 영훈의 안색이 파리해진 날, 재현은 교무실에 불려갔다. 중상위권을 적당히 웃돌던 재현이 전교 1등이란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빠르게 퍼져나가 영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훈이 재현에게 따져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냥 네가 알려 준 대로 공식 대입하니까 술술 풀리던데.”
“…….”
“너 나 의심하냐?”
“아니, 그건 아닌데…….”
“조금 서운하네, 영훈아.”
“…….”
“나는 너 수석으로 입학했을 때 축하해 줬는데.”
재현은 보란 듯이 이어진 기말고사에서도 1등을 거머쥐었다. 영훈은 여전히 필요 이상의 질책을, 재현은 여전히 싱거운 칭찬을 받았다.
영훈은 납득할 수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2인자가 된 탓이었다. 분명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때까지 연필을 쥐고 있을 때 쟤는 가볍게 교과서를 훑고 있었는데. 가끔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면 내 얼굴 구경이나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재현에 방에서 러트 억제제를 발견했을 때 격분하며 따졌다. 재현이 난색을 표하며 중얼거리듯 항변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내 곧 당황의 기색을 지워 버린 재현의 얼굴은 태연했다.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하는 건 예사도 아닌 애였다.
“근데 애초에 네가 물어본 적 없었잖아, 영훈아.”
“…….”
“그리고 내가 알파면 뭐 어쩔 건데. 달라지는 게 있어?”
“…….”
“그래도 속여서 미안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내가 원하는 게 뭔데? 영훈은 차마 묻지 못했던 그 의미를 시험 당일에 알게 되었다. 시험 대형 맨 뒷자리였던 영훈이 중간 줄에 있던 재현의 OMR 카드를 걷을 때였다. 재현은 빠짐없이 마킹했으나 반, 번호, 성명 항목이 공란이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하지만 2학기 중간고사에서도 전교 1등이란 수식은 재현의 몫이었다. 담임이 재현을 따로 불러내 고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재현도 일종의 쇼맨십이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커리어에 흠집 내 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건 분명 부정행위였으나 아무도 부당한 처사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게, 알파의 권력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현이 자신을 상대로 수음한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둘의 사이는 눈에 띄게 악화됐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든,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복형제든,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붙박이처럼 굳어 버린 두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도망쳐야 해. 지옥 같은 현실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나마 숨통이 트일 만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도피하려고 했다. 도피처는 오메가 기숙사 학교였다. 그러나 재현이 한발 빨랐다. 먼저 알파만 입학이 허용되는 학교로 전학 수속을 밟은 것이다. 원래는 영훈이 발현 후 진학하려던 곳이었다. 전교 1등의 자리는 영훈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영훈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있었다.
오메가로서의 발현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꿈도, 기회도. 베타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모든 방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알파가 아닌 베타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이유. 엄밀히 말하면 경찰이 상위층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소수의 알파들이 제 편의대로 구축해 놓은 사회규범과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게 바로 경찰의 역할이었다. 즉, 상위 계층 알파들의 끄나풀쯤 되었으나 철모르는 도련님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제복이 멋있어 보여 품었던 꿈이었다. 후에는 꽤나 진심이 되었다. 아버지처럼 나쁜 사람 잡아다 철창에 처넣고 싶었다. 공권력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저 같은 주입식 실패작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형질을 가진 자들은 변수가 많아 공권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검찰계는 얘기가 좀 달랐다. 눈알 돌리는 족족 널린 게 알파였다. 그건, 그들이 로열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재현도 속해 있었다. 탄탄대로를 밟은 그는 검찰청 소속이 되었다.
격차는 돌이킬 수 없었다.
영훈이 손목을 그은 것도 그쯤이었다.
모든 게 무료하고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담배를 입에 문 영훈이 불을 붙였다. 새하얀 연기가 슬슬 어스름 지는 하늘, 그 붉음의 언저리를 향해 뿜어졌다.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으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살아 있는 게 맞나.
영훈도 알았다. 자신은 태생적으로 나약하다는 것을. 오기로 시작했던 담배였다. 처음 물었을 때는 목이 타들었다. 두세 번 피울 때까지도 연신 기침을 뱉었다. 태우고, 또 태우고. 드디어 중독되고 나서야 느낀 것. 담배는 악마 같다. 해로운 걸 알면서도 벗어나는 게 참 힘들어 여태 끊어내질 못하고 유일한 오랜 친구로 남겼다. 누군가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딱 걔 같다.
리스트 컷. 죽기 위해서가 아닌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영훈이 필터를 깊게 빨았다가 훅 내뱉었다. 나와는 별개의 불쌍한 족속들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꼈다.
영훈의 흰 손가락에서 맥없이 추락한 담배 끝 불꽃이 점멸한다. 서서히, 처절하게. 그게 꼭 살기 위한 발버둥 같아서 영훈은 차마 밟지 못했다. 제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등쌀에 휩쓸려 주관 없이 살았던 지난날들, 미친 듯이 공부했던 시절들. 명문 학교에 입학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나날들.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거의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영훈은 부엌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곧, 영훈의 손목에서 붉은 노을빛이 흘러넘쳤다.
연수원에서 지내고 있던 재현은 영훈의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마저도 와전되어 전해졌다. 단순히 영훈이 물의를 일으켜 임시로 거처를 옮긴 정도로만. 해를 거듭할수록 추락하는 영훈을 지켜보는 마음은 생각보다 편치 않았다. 이러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단단했던 무게 중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청이는 근간을 다잡기 위해선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하루 빨리 정의 내려야 했다. 재현은 비상한 머리로 제 감정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너의 몫이었고, 그것들을 다 빼앗았더니 종국에는 소유하고 싶은 게 김영훈 그 자체였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김영훈을 사랑한다. 뒤늦게야 깨달은 감정은 끝을 모르고 치닫기 시작했다.
이 시나리오는 싸구려 삼류 드라마쯤 되었고,
흔하디흔한 악연의 서사를 이루었으며,
그 안에서 재현은 이미 악역이었다.
그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만약에, 베타였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형질 같은 거, 타인에게 넘겨버릴 수 있는 그런 거였다면 기꺼이 네게 줄 수도 있었는데. 차라리 너한테 넘기고 이 가시밭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애초에 너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차피 형질에 구애받지 않던 시절에도 재현은 힘들이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들을 손에 쥐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권력 다툼, 집안 싸움. 이런 골 아픈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을 의식하며 아등바등 살아갈 일이 없었다. 존재론적 허무를 떠안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았다. 이 집에 들어온 순간, 김영훈을 봤다. 영훈이 연필을 쥐는 폼새에선 엄하게 가정교육 받은 흔적이, 고생 한번 안 해봤을 하이얀 손에는 분홍빛 혈색이 돌았다. 온몸으로 도련님 티를 냈다. 재현만이 그런 사소한 포인트를 감지했다. 분명 시초는 열등감이었는데, 점점 욕심이 생겼다. 네가 가진 것들 전부 빼앗으면, 너한테는 나밖에 없지 않을까.
늘 비상하다 믿어 의심치 않은 머리로 그리 멍청한 판단을 했다. 우는 법을 모르는, 아니, 살아남기 위해선 몰라야 했던 재현의 폐부에 습기가 들이찼다. 그동안 부정했던 인고의 시간이 부질없게도 그건 사랑이었다. 네가 나에게 딱 두 번째만 되었더라면, 이렇게 먼 길을 에둘러 오진 않았을 텐데.
전(轉)
저택에서 유혈사태를 일으킨 영훈은 격리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넓은 집에 덩그러니 혼자였다. 아플 때 혼자라는 사실은 늘 서글프다.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몸살이었다. 식은땀에 절은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골이 울린다. 당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그러기를 몇 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좆같은 클리셰가 발동했다. 지금 이 판국에 약은 없었다. 결국 손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타들어가는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몸살인가 봐요. 차마 자존심에 히트 사이클의 전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메가 진단이 내려진 순간 걱정스러웠던 눈빛이 싸늘함으로 변모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선에는 얼음발이 서렸지만 우습게도 그에 화상 입는 영훈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쩌다 보니 부모님과 체면 차리는 관계가 됐다. 그들에게 자식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었던 영훈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실패작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연락할 곳이 그뿐이었다. 이 나이 처먹고. 재현에게 연락할 수도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부모님은 영훈이 가정한 최악의 경우를 불러일으켰다. 늘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영훈이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는 사무적인 사용인보단 몇 년 같은 공간에서 몸 부대끼며 지냈던 재현이 적합한 보호자가 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판단에서였다. 그 둘이 함께 있으면 태연한 재현과 달리 영훈의 안색은 파리해졌으나 재현에게만 관심을 두는 그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점심 식사도 거르고 서류에 집중하던 재현이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친척들의 뒷말과 온갖 품평에도 흐트러지는 법 없던 무심한 얼굴이 평정을 잃었다. 몸을 일으키는 몸짓에 일체의 여유와 계산이라곤 없었다. 재현의 팔꿈치에 스친 종이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게 꼭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약국에 들러 온갖 종류의 약을 쓸어 담았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몰라서였다. 당사자에게 묻는다고 해서 대답할 리 없었다. 애초에, 연락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히트 사이클 억제제도 드릴까요?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재현은 조금 당황했으나 달라고 말했다. 부작용에 대해 안내받으면서 새삼 느꼈다. 너와 나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구나. 오메가의 숙명 같은 것들을 재현이 헤아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달려온 게 무색하게도 현관 앞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하고 자극적인 향이 코끝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늘 영훈에게서 나는 미미한 향, 거부할 수 없는 그것.
아, 좆됐다.
재현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십 번은 고민한 끝내 결론 지었다. 그래도 약은 먹여야지 싶었다.
발현이 늦은 만큼 히트 사이클도 비정상적인 궤도를 달렸다. 불규칙한 주기로, 지독하게.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들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영훈의 호흡이 거칠었다. 온몸으로 퍼지는 날카로운 통증 앞에 무력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아 눈물만 줄줄 흘려내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끙끙 앓던 영훈의 눈가에서 기어코 서러운 눈물이 터졌다.
이 모든 건 다 이재현 때문이다.
사실 발현은 재현과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쯤이야 영훈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버팀목 삼을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다.
“씨발, 이재현 개새끼…….”
험악한 욕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연신 그렇게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재현이 나타났다. 그리도 갑갑해 하던 값비싼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채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재현이 억제제를 먹이려 드는 순간까지 일련의 과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개새끼야.”
“그래. 내가 개새끼고 다 내 탓이니까.”
이것 좀 삼키면 안 될까, 영훈아.
그 순간에도 다정한 목소리에 뒤가 울컥 젖어들었다. 호흡을 참느라 조금 억눌린 음성이었으나 영훈이 알 리 없었다. 순 가식덩어리다. 나를 해치러 온 짐승이다. 터져 나오는 불규칙한 신음은 초식 동물의 울음을 닮았고, 지금 이 순간, 재현은 영훈에게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육식 동물과도 같았다.
이재현,
“죽여버리고 싶어.”
그리고 곧 그 말은 ‘죽어버리고 싶어’로 재현의 귓가에 꽂혔다. 여태 쏟아지는 육두문자들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재현이 더 주체하지 않고 무력을 썼다. 영훈의 몸부림에 의해 물컵이 산산조각났다. 재현의 행동이 일순 굳었다.
“이미 늦었다고. 이런 거 다 아무 소용 없어. 넌 그런 것도 모르고 사는 주제에…….”
가식적인 이재현은 그 어떤 순간에도 가면을 벗는 법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구잡이로 악을 쓰는 영훈과 침착한 재현의 태도는 대비되었다.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싫어, 꺼져, 사라져. 이미 눈에 뵈는 것도 없겠다, 그렇게 아픈 말만 뱉어내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어.”
영훈은 몸이 달았다. 이 와중에도 자길 걱정하는 그 목소리는 또 너무 달았다. 갑자기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이러다가 딱 죽을 것 같았다. 히트 사이클을 약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 넘겨 본 적이 없었다. 잔뜩 곪은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건 너무도 생경한 감각이라서, 오늘은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나 이러다 죽겠다고,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그렇게 이성을 놓고 매달렸다. 그게 기폭제로 작용했다. 입술이 포개지고, 오직 원초적인 감각으로 서로를 대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건 둘 모두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폭풍처럼 몰아쳤던 정사의 여파로 몸은 이곳저곳 쑤셔 왔으나 내내 영훈을 괴롭히던 끔찍한 감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거짓말처럼 개운했다. 어이가 없었다. 본능에 충실한 짐승처럼 매달린 게 고작 몇 분 전의 일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뒤늦게 밀려오는 수치심에 속이 타들어갔다. 그냥 다, 감당이 되질 않았다. 살면서 죽여 버리고 싶었던 상대와 섹스하는 경우가 흔할까. 그리고 그게 한때는 친구였던 이복형제일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한 걸까. 누굴 탓해야 하지. 그래, 이 모든 건 다 이재현 탓이지. 그렇게 생각해야 편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영훈은 있는 힘껏 재현을 노려보았다.
“내 앞에서 꺼져 버려.”
그 외마디를 마지막으로 간신히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착잡한 표정으로 영훈을 가만히 깔아보던 재현이 손을 뻗었다. 땀에 젖어 마구잡이로 흩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결이 좋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물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하얀 엉덩이 사이로 엉겨 붙은 정사의 흔적을 수습했다. 의식 없는 몸이라 차라리 수월했다. 분명 조심한다고는 했는데 피가 조금씩 묻어났다. 영훈의 은밀한 구석까지 침투한 건 저가 처음인 듯했다. 괜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서투른 뒤처리를 마친 뒤에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하지만 유리 파편은 영훈의 머리칼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날카로웠다. 재현의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둘 다 피를 보고 마는구나.
시체처럼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우리의 악연에 대해 고찰했다. 가진 게 없던 나는 너를 숙주 삼아 기생했다. 그렇게 네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흡수하고 파괴하면서 쾌감을 느꼈다. 네가 추락하면 내 속이 좀 편해질 것 같았는데, 치졸한 열등감이 사그라들 것 같았는데. 네가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한때 내가 이 집 친인척들에게서 받았던 멸시와 수군거림은 모두 너의 몫이 되었지만 되려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 재현아, 너는 내가 싫어? 귀찮아…?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웅얼거리던 그 애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음에도.
― 아니. 안 귀찮아.
막상 김영훈이 죽는다는 가정을 하면 덜컥 겁이 났다. 지금도 그랬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을 감은 창백한 얼굴, 코 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미미한 숨결을 느끼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결국, 갖고 싶은 건 얘 하나였는데.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영훈은 더 이상 재현의 방을 찾지 않았으나 자신은 이따금 영훈의 방 문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었다. 저조차도 이해되질 않았던 그 행동이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감정의 무게가 버겁다.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왔던 세월이 허무했다.
내 목숨은 꼭 네가 거둬.
그러려면, 아직은 살아 줘.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건 기억의 단편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영훈과 재현은 같은 반이었고, 영훈은 학급 반장이었다. 그에게는 반장으로서 학급의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부여됐다.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들아, 자습 시간이잖아. 우리 조, 조용히 하자.”
결국 목소리 끝이 떨려 조롱거리를 만들고야 말았다.
“야, 니네 집 잘 산다매. 어차피 선생 매수해서 시험 문제 얻어낼 거면서.”
“내 말이. 얻다 대고 완장질이야. 허수아비 반장 주제에.”
치솟는 억울함에 말문이 막혔다.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재현이 영훈의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성준아, 너 드라마 너무 많이 봤다. 영훈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알면서.”
“…….”
“그리고 진호야, 반장 지원했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너 그때 허수아비 역할 자원한 거 아니잖아.”
적당한 압력에 찍소리도 못했다. 재현의 통솔력과 사교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재현은 무리에서 군림하는 사자였으나 그때만큼은 영훈의 충견이었다. 재현에게 영훈을 구해 줄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늘 그렇게 했다. 그는 그렇게 종종 영훈을 구원해 주었다.
영훈은 이제야 깨달았다. 갑작스런 발현으로 허덕일 때, 아버지에게 담배를 들켰을 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난항을 겪을 때…… 너는 항상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줄곧 뿌리친 쪽은 나였다.
― 영훈아, 너 향수 뭐 쓰냐?
― 안 쓰는데.
어쩌면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니. 그래서 나를 볼 때마다 호흡을 굳혔니. 본능을 거스르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발바닥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리 조각을 밟은 모양이었다. 발밑으로 검붉은 피가 스멀스멀 퍼져 나왔다. 발바닥을 살짝 들자 보이는 건 재현이 미처 치우지 못한 유리 파편 잔해였다. 그렇게 꼼꼼하고 치밀한 애가 흔적을 남겼다. 경황이 없긴 없었나 보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재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요리에 열중하던 재현이 인기척을 느끼고 불쑥 뒤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답지 않게 난색을 표하던 재현이 이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신속하게 사라져 주려고 했는데.”
“…….”
“너 혼자 있으면 약도, 밥도 안 챙길 것 같아서.”
얼굴 보고 할 얘기도 있고.
늘 먼저 시선을 피하는 쪽은 영훈이었으나 오늘은 예외였다. 어딘가 쑥스러운 낯의 재현이 시선을 거뒀다. 낯설었다.
“각인했어. 당분간은 일상에 지장 없을 거야. 갑자기 어제처럼 그런 게 불쑥 오는 일 없을 거고. 네 말대로 나는 직접 겪어 보질 않아서 어떤 느낌인지 잘은 모르지만.
"……."
“근데 일시적인 거니까 가끔 필요하면… 나 이용해. 어차피 볼 장 다 봤지 않냐. …어, 속 긁으려고 하는 말 아냐. 그냥 미안… 해서 그래. 말했다시피 영구적인 건 아니라서 나중에 너 결혼 상대 생겨도 아무 문제는 없을……”
다시금 시선을 맞춰 오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이어가던 말이 뚝 끊겼다. 근데 너.
“다쳤네.”
영훈은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재현을 응시했다. 손가락을 베였을 때 달려든 소름 끼치는 감각에도 끄떡없던 재현의 얼굴이 영훈의 얼굴과 붉은 발자취를 번갈아 보는 새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정말 약국을 다 털어 온 건지, 봉지에서 소독약과 연고가 나왔다. 재현이 영훈의 무릎을 굽혀 영훈의 발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어제처럼 더없이 자상하고 세심한 손길이 박힌 조각을 빼냈다. 조심스럽게 소독을 마친 뒤 연고를 묻혀 영훈의 상처 위에 펴 바르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도 생채기가 있었다.
“미안. 치운다고 치웠는데.”
분명 영훈의 과실이었음에도 애꿎은 본인이 사과를 한다.
“내 탓이니까 책임지고 흉 안 지게 할게. 그냥 병원만 성실하게 다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조곤조곤 다정하게 이어지는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증오, 원망. 마음의 응어리들이 다정에 녹아 없어지려 했다. 책임진단 말이 이렇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제가 아는 이재현은 정말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진짜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영훈은 늘 손목에 차고 있던 아대를 풀었다. 재현에게는 초면인 상처였다. 그 잘생긴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이것도 너 때문인데.”
그러니까, 책임져.
재현이 무너져 내리듯 영훈 앞에 무릎 꿇었다. 속죄하는 신도처럼 그 하얀 발등에 입 맞추며 모든 진실을 고백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연신 속죄의 말을 내뱉으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었으나 영훈에게 아버지는 한없이 큰 사람이었고, 그 커다란 손아귀에서 놀아나느라 곧 죽어도 홀로 깨닫지 못했을 사실들이었다. 고해성사를 마친 재현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은 없었다.
“근데 영훈아.”
“…….”
“나 실컷 싫어해도 되는데.”
“…….”
“그래도 미워하진 않으면 안 되냐.”
너무 어렵나. 하며 애써 웃는 낯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저 죽도록 미워했다.
단 한 순간도 너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그러지 못하는 내가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내막을 듣고 나서는 이제, 미워할 수조차 없었다. 가슴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영훈은 저의 하나뿐인 구원자에게로 손을 뻗는다. 너도 다쳤잖아. 재현이 물기 어린 눈으로 영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영훈은 그 시선을 꿋꿋하게 받아내며 서랍장을 가리켰다. 저기에 밴드 있어. 가지고 오면 붙여 줄게.
일종의 회피였다. 난생 처음 보는 재현의 우는 얼굴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
곱씹을수록 벅차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였다.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아 온수를 채웠다. 거울에 서린 김을 살짝 닦아 냈더니 바보처럼 눈가가 빨갰다. 무엇이든 감당하기 어려울 때 눈물부터 짜내고 보는 이 버릇은 고쳐지질 않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이 볼품없어 보였다. 더 보기 싫어 옷을 벗지도 않고 도망치듯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쳐 영훈아.
아니면, 나랑 도망갈래?
그 음성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심장은 요란하게 박동했지만 머릿속은 새하얬다. 여기서 또 눈물을 흘리면 한동안 눈가가 따가울 것 같아서 눈을 꾹 감고 수면 아래로 얼굴을 묻었다. 속수무책으로 젖어드는 게 몸인지, 내 마음인지. 가끔 속이 답답한 날이면 이렇게 욕조 물을 받아 놓고 고개를 처박았다. 잡념이 사라지고, 제2의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오늘은 그조차도 잘 안 됐다. 이 수법은 상상력 풍부한 어린 시절에야 먹힐 법한 방법이었으니까. 옛 버릇이었다. 진짜 애정결핍에 퇴행이라도 왔나. 무릎을 끌어모은 채로 수중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재현의 손을 잡을까, 말까.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 이제는 그냥 마음 편히 걔가 이끄는 대로 따르고 싶었다.
얼마나 숨을 참았을까,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치켜들었더니 어느새 이재현이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곧장 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빳빳하게 굳어 있다 걔가 가슴팍에 두 손을 겹쳐 올리길래 황급히 어깨를 밀쳤다. 그리고 나는 곧 그게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 시도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품에 끌어당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재현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야, 내가 먼저 씻으랬지 언제 황천길을 먼저 가랬어.”
“아니야, 그런 거…….”
“이 콩가루 집안을 뜨자니까 이승을 등지려고 하고 있네.”
불러도 대답 없길래 혹시나 해서 들어왔는데. 나랑 튀는 게 그렇게 싫었냐? 애써 능청스러운 음성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너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같이 씻는 수가 있어.”
나는 그 대목에서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화해한 지 하루도 안 됐어. 이재현 까불지 마….”
화해라는 말이 이리도 간지러운 말이었을까. 서로 다정히 마주 볼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던 게 고작 며칠 전이었는데. 전에 없는 이 따스한 눈길이 벅차기만 하다.
“우리 정말로 도망가?"
“그럼 가짜로 도망가냐.”
“너는 잃을 게 많잖아.”
“내가?”
말문이 막혔다. 의아한 얼굴로 던지는 반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니면 말고.
“지는.”
하긴, 것도 그렇네. 사실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줄곧 확인하고 싶었던 게 있었고, 지금이 그걸 물을 타이밍인 것 같았다.
“재현아.”
“어, 영훈아.”
“너 진짜 나 책임질 거야?”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재현이 대답했다. 어.
“책임질 작정 않고 덤비는 건 짐승이지.”
예, 아버지. 아, 호적이요. 나중에요. 요즘 일이 바빠서. 어차피 저 아버지 아들인 거 다들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인데. 서두른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네, 저도요. 더 자랑스러운 아들 될게요. 영훈이 이제 괜찮아요. 궁금하실 것 같아서. 내일모레요? 당연히 참석해야죠. 가족 모임인데. 그때 뵙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재현은 고급 세단에 시동을 걸었다. 근본 없단 소리 들어 가며 몇 년 동안이나 반쪽짜리 호적 지킨 이유. 첫째, 서류상으로라도 평생 이 집안에 묶여 있기 싫었고. 둘째, 다른 건 몰라도 형제 같은 거, 너랑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버틴 덕에 너한테 프러포즈할 타이밍도 다 재잖아.
“어, 영훈아.“
이제 다 끝났어.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집안에서 벗어날 거라고 했지, 내가.
플랜 A
처음에는 혼자
플랜 B
다음에는 같이
두 사람 몫의 비행기 표를 챙겨 영훈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경쾌했다.
***
영훈은 흥분하면 울었다. 재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영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손목 흉터에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많이 아팠지. 어느샌가 낮게 가라앉은 재현의 눈시울이 또 붉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했다. 가면을 벗어낸 재현은 그새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이따금 그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마다 영훈도 눈가가 뜨거워지곤 했지만 로맨스의 기류가 급 신파로 전환되는 그 순간이 퍽 멋쩍었기에 열심히 항변했다. 진짜 하나도 안 아픈데…. 그러고는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재현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콘돔 가지러. 열성인 영훈이 임신할 확률은 희박했으나 재현은 콘돔을 꼭 챙겼다. 책임질 자신이야 있었지만 아직은 둘이서 행복하고 싶다. 잠깐만 기다려. 하지만 영훈은 지금 이 꿈같은 순간을 깨기 싫어서, 재현의 소매를 꾹 쥐었다.
“괜찮아. 그냥… 하자.”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어 놓고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영훈이나, 알았다는 그 짧은 대꾸를 뱉으면서도 말을 더듬는 재현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셋이면 더 행복할 것 같기도 하고. 재현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할 때, 영훈이 좀 더 용기 내어 목에 팔을 감은 뒤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재현이 영훈의 턱을 부드럽게 쥐곤 입술 새를 파고들었다.
곪아 터진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럼에도 재현이 영훈의 가는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펴 바른 연고가, 영훈이 재현의 손가락에 꼼꼼하게 감아 준 뽀로로 밴드가 회복을 도울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평생의 흉터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딱지가 앉으면 더 견고해질 테니까.
“내일은 뭐 할까?”
재현은 문득 깨달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사랑스러운 체향이 물씬 풍기는 목덜미에 코를 박고, 바다 가고 싶어. 영훈의 음성으로 떨리는 살결을 느끼며 그러자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 순간이 눈물나게 행복했다. 이외에는 바라는 것도 없었다. 이쯤이면 충분했다.
“또 할래?”
아 씨발 행복해. 방금 한 말 취소.
영훈의 위에 올라탄 재현의 등 뒤로 어느새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영훈이 손을 올려 그 빛을 움켰다. 뼈마디 사이로 붉게 상기된 재현의 얼굴이 보였다. 뭐 해, 영훈아. 아무것도 아니야. 집중 안 할래? 알았다구…. 개인지, 늑대인지 굳이 분간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재현은 영훈에게 맹목적인 충견이었으며 침대 위에서는 일생을 짝에게 바치는 늑대도 되었다.
.
개와 늑대의 시간. 結